기억은 틈으로 구멍 뚫려 빛난다
⎯ 사진가 김효연과 그의 작업에 대해서
장혜령ㅣ소설가
2017년 7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뉴스가 이곳저곳에서 쏟아졌다. 그날, 김효연은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전쟁이 날 것 같다고, 전쟁이 나서 부산으로 올 때는 기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염려가 지나치다고 느껴서 그녀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전쟁에 대한 어머니의 감각과 자신의 무감각 사이의 차이를.
어머니의 불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깊이 닿아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가족사가 떠올랐다. 엄마의 엄마, 그녀의 외할머니는 1945년 이전 히로시마에서 한국으로 오셨다고 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가족들은 (큰오빠 한 분을 제외하곤) 원폭으로 돌아가셨다고도 들었다. 외할머니는 일찍이 부재하셨지만, 그 부재는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부재로서 실재하고 있었다. 부재와 더불어 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형의 사건이었다. 이전까지는 엄마의 ‘이야기’일 뿐이었던 그 이야기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어렴풋하게만 알았던 할머니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졌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핵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45년 8월의 히로시마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자료들과 일본의 원폭피해자에 관한 영문 기사나 인터뷰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분명 할머니는 원폭피해자 가운데 한국인이 많다고 했었는데, 그 점이 의아했다. 검색을 하다가 합천에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의 링크를 발견하게 됐다. 100명 남짓 되는 원폭피해자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그 시설은 꽤 큰 규모였다. 한국에 원폭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회관이 있을 정도인데, 히로시마 출신인 할머니를 둔 자신은 정작 이 문제를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 건 2018년의 일이었다. 그녀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전화를 걸어 방문 약속을 잡고 합천으로 떠났다. 그 일이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작업의 시작이 될 것임을, 그 날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그곳에 머무는 할머니들이 외부인인 자신을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복지회관 지부장 심진태 씨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로비까지 들어가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밥을 먹거나 진료 받는 할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그들의 언어에서, 그녀는 히로시마 출신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외할머니는 평생 한국어에 서툴렀다. 심진태 씨가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문서수장고였다. 그곳엔 합천의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비공개 신상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장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선반마다 꽂혀 있던 엄청난 양의 노란색 파일들. 데이터베이스화되지 못한 무수한 기록들. 파일 철 속엔 45년 당시 피해자의 거주 증명서, 진료기록 또는 진단서, 히로시마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흑백사진들. 하나의 파일은 한 사람⎯한 명의 원폭피해자⎯를 의미했다. 훗날 그녀는 이 파일의 개수를 직접 세어서 확인했다. 5,001개. 방대한 분량의 기록들 앞에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내가 이걸 다 책임질 수 있을까.” 그녀는 다시 합천에 갈 용기를 쉽게 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 역시 그녀의 염려와 같은 이유로 작업을 만류했다. 합천은 일단 뛰어들면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녀는 이 시기 “외할머니가 집앞 개울가에 띄워놓은 예쁜 종이배를 따라갔는데, 어느 순간 배는 사라지고 혼자 망망대해에 다다른” 막막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결심한다.
그곳으로 다시 가겠다고.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다시 가겠다고.
두려움에 방황하던 한 사람은 어째서 어느 날 갑자기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김효연에게 여러 차례 묻고도 뾰족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무언가 들었다 해도 나로썬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생각했다. 5,001개의 봉인된 비밀들. 히로시마에서 온 할머니를 닮은 여자들. 그 이미지들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기에, 잊히지 않는 질문 같았기에 그녀가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2018년 초봄, 촬영을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었다. 다만 그녀는 알고 싶었고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으며 목격한 바를 기록하고 싶었다. 처음엔 촬영을 앞세우기보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얼굴을 익히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할머니들의 일상 사진이나 증명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인화해 보내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준 사람들은 종종 있었으나, 그녀는 영정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영정사진이 아닌 사진. 어쩌면 죽음을 앞둔 사람,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닌 한 인간을 찍고 싶었다는 뜻이었을까? 그녀의 이 말은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역사 속 지워진 한 페이지를 쓴다는 감각으로 그녀는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이면 할머니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뒤얽힌 선명하고도 고통스러운 꿈을 꾸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언제부턴가 할머니 한두 분이 그녀에게 자기 이야기,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감각이상>의 초기 일 년 간 작업은 한국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이 대문자 역사에선 지워졌을지언정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 생각에 이때까지 그녀는 히로시마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주제에 끌려가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들의 손에 하염없이 이끌려가다가, 문득 그들이 가자고 하는 데까지 따라가 보자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설령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그러나 끌려갈 수만은 없는 순간이 온다. 타자의 이야기가 공허한 울림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편에서도 무언가 응답해야 한다. 응답의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렇듯 상대의 힘에 그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도 붙잡으려면 강한 악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써 꺼내어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상대와 어떤 대등성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45년의 히로시마와 원폭피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당사자를 대등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김효연이 말해주지 않은 그녀의 사진 너머를 이해하기 위해 45년 히로시마 원폭 자료들을 가능한 찾아 읽었다. 원폭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는 대부분 낯선 조사원 앞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고 고통을 증언한 음성 언어를 채록한 것이었다. 나는 자료를 어느 정도 읽은 끝에, 왜 원폭피해자에겐 고통의 서사만 남아 있을까, 를 질문하게 됐다. 그러곤 고통의 서사 속에 기입되어 있지 않은 빈틈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상상했다. 이 빈틈 속에 어쩌면 대등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글 쓰는 나의 물음이자 쓰기의 공간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히로시마와 히로시마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오래 배회하며 응전(應戰)의 서사를 찾고자 했다.
그녀는 서울과 합천 사이를 오가기가 힘겨웠다고 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면서부터 그녀는 합천에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고 없는 시골 마을에서 지낼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합천 시내의 게스트하우스(시내에 게스트하우스라곤 노래방을 개조해 만든 이곳 한 곳뿐이었다), 원폭피해자복지회관 사무장이 매매로 내어놓은 빌라 등을 전전한 끝에 평화의 집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평화의 집은 합천의 원폭피해자 2세들을 위해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으로 건립한 작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회관에선 만날 수 없던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화의 집에 오는 이들 가운데는 2세의 자녀들⎯10대이거나 10대가 채 되지 않은 3세와 4세 아이들-도 있었다. <감각이상>에서 사진의 중심이 되는 두 자매도 이곳에서 만났다. 촬영 당시 아홉 살, 열한 살이었던 아이들의 할머니가 원폭 피해자였다. 아이들의 엄마는 원폭 피해자의 심리 상담 치료를 맡아 평화의 집에 일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자연히 이곳으로 와서 시간을 보냈다. 김효연은 어린 나이에 원폭피해자 사무소를 집처럼 드나드는 아이들의 모습과, ‘원폭’ ‘원폭피해자’란 단어를 일상의 언어로 쓰는 그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원폭 3세, 혹은 4세로 호명되는 대상화된 피해자와 그녀가 실제 마주하는 고유한 개인들 사이엔 큰 간극이 있었다.
자꾸 아이들에게 마음이 갔다. 그녀가 그 아이들 또래였을 때, 그녀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어쩌면 그 아이들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온 할머니를 바라보았던 과거의 자신을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작은 비행기 모형을 들고 선 여자아이의 모습에서 잊고 지냈던 자신의 유년을 겹쳐 보았다. 그 이미지는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거울 이미지와 같았다. 이윽고 그녀에게는 할머니들의 이미지가, 그들 속의 히로시마가 한국을 사는 지금 우리의 거울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는 불가능한 가정을 했다. 만약 외할머니가 44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히로시마에 남아 있었다면. 만약 외할머니가 그때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를 타지 못했다면. 만약 외할머니가 그때 유산했던 아이를 낳았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도 세상에 없었을지 몰랐다.
내가 만약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면 살았을지도 모를 삶, 반대로 지금의 내가 살아남았기에 여기 없는 타자의 삶을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유령 같은 그들을 등지고 우리는 지금 여기 거울 바깥에 서 있으므로. (아니, 그들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면 우린 거울 속에 있는 것일까?)
그녀 사진의 대상은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거나 노약자이거나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는 아이들이었다. 대형 카메라를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이즈원에서 나온 중형 디지털백 카메라를 썼다. 어떤 매체(표현 방식)로 이 이야기를 구현할 것인가, 혹은 이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서 어떤 표현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의 문제에 있어 그녀에겐 후자가 먼저였다. 최소한 합천에서는.
촬영이 단 한 번에 이뤄진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사진의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얼떨결에 촬영을 하고, 얻게 된 이미지를 곰곰이 들여다보고, 몇 년에 걸쳐 몇 번씩 만나 다시 사진 찍기를 거듭했다. 사진이 ‘잘 나왔다’고 생각한 때도 그랬다. 매번은 다른 순간이었으므로.
그녀는 사진의 대상을 피해자로만 보이게 하는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폭피해자가 아닌 한 인간에게 집중하려 애썼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원폭피해자 가족을 찍으러 그들의 집에 갔다. 그 집의 네 자매 중 첫째와 둘째의 원폭증이 심각했다. 지적장애가 있던 둘째가 마당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그 어머니가 “사진을 찍으러 왔다면 이런 걸 찍어 가야지.”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 원폭피해자들은 사회적 지원과 관심을 호소했고, 사회는 그들이 얼마나 피해자다운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런 그들에겐 고통의 증언만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을 터였다. 그 어머니의 태도는 한국 사회의 뒤틀림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인간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원칙과 윤리가 필요했다. 그녀는 누구를 찍든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나누는 데 시간을 쏟으려 했다.
한편 고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 보는 이들이 그걸 견디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보는 이에게 죄책감을 주는 것이 작업의 목적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70여 년 전, 그 폭발의 한 순간으로부터 벌어진 이 모든 일들과 그 시간들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사진의 대상과 관람자 사이에 가족이란 코드가 ‘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대 다큐멘터리 작가들과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은 달랐다. 그녀가 보았던 많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이거나 전달자로서 사진을 작업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사진의 대상과 맞닿아 있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가족들이 있었다. 그녀는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들과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점차 깊이 이야기 나누게 되었고, 그러면서 서로의 “기억이 단단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물었다. 그녀는 각자의 마음에 묻어만 두었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고 다시 구성되는 경험을, 가족들이 함께 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단단한 기억이란 단어에서 은빛 실로 엮인 거미줄을 떠올려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간직한 기억은 은빛 실 한 올이 아닐까. 기억은 언제나 나 아닌 것과 관계하기에 한 올의 실은 반드시 다른 실과 만나 엮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짜임은 느슨해지기도 팽팽해지기도 할 것이다. 때로 어떤 기억은 자꾸만 엉킨다. 이 매듭을 억지로 풀어내다가는 도리어 실이 끊기고 말 것이다. 끊어진 것은 그저 끊긴 채 남는 걸까. 어쩌면 끊어진 기억은 끊어진 채로는 기억이 되지 못하고 다른 기억에게로 닿을 때에야 비로소 기억이 되는지 모른다.
기억의 실들이 얽히고 뒤얽히며 허공에 길을 낸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런 거미줄 같은 형상이지 않을까. 무한히 중첩되면서 시시각각 형성 중인. 어떤 각도에서는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깊은 심도를 지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많은 실오라기들이 사방으로 얽혀들어 겹겹의 결을 이룬. 어느 하나를 빼거나, 더하거나, 매듭의 위치를 바꾸기만 해도 전체 짜임이 바뀌고 마는.
거미줄은 촘촘함으로 단단하다. 촘촘하지만 바람이 드나들 틈이 있어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서로의 기억이 닿고, 스치고, 어긋나고, 다시 닿은 자리엔 언제나 완전히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나뭇잎의 벌레 먹힌 구멍이 빛나듯, 기억은 틈으로 구멍 뚫려 빛난다.